예레미야 19:14~20:6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를 제사장이자 성전의 총감독인 바스훌이 때리고 차꼬에 채운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치고 환장한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쓸 겁니다. 심판과 회개를 강조할 때 듣기 싫어한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이미 한 마음이였습니다. 백성들 눈에는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예레미야편이 아니고 그를 때리고 차꼬에 채울 수 있는 권세를 지닌 제사장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눈에 보이는 “복”을 지닌 자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당시 백성들이 했던 것과 같은 짓거리를 지금도 분명히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복 신앙이 무서운 겁니다.
이 일이 언제 재현이 됩니까? 십자가에 예수님을 내주었을 때였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하나님은 권세를 지닌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편이셨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절대로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임당하실 수 없으셨던 거죠. 그러니 그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의 대가를 자신들과 자기 자녀들에게 돌리라고 담대히 말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에 동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사람들도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그 대가를 치르게 되고요.
절대로 누군가를 아프게 할 일에 동참하지 마십시요.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할 때 당신의 눈에서 피눈물이 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해석에서는 바스훌의 예를 들며, 내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 할 때 나를 가장 도와줄 것 같은 사람이 도리어 나를 핍박할 수 있다고 하셨고, 성도는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알고 주님만 더욱 의지해야 한다고 하셨답니다.
제가 20년 정도 사모로 살다보니까 사람을 좀 볼 줄 알게 된 것 같아요. 사람이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건 맞는 소리예요. 사람이 얼마나 약한데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믿고 얘기를 나누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은 있어요. 누구냐면 연단을 통과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사람들이예요.
어려워보지 않은 사람은 어려운 사람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해요. 노력해서 실패해 보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의 심정을 알지 못해요. 사람이 그래요.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판단할 일이 아니예요. 나도 사람인 걸요. 저 인간은 왜 저러냐고 정죄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저 서로를 불쌍히 여기고 기도해줘야해요. 자아가 죽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한답니다. 우리는 옳지 않아요. 오직 주님만이 옳으십니다. 그러니 그 분의 말씀에 아멘!하면서 따라가시자고요.
이렇게만 얘기하면 또 헷갈려하시더라고요. ㅎㅎㅎ 우리가 판단해서 떠나야 할 사람도 있어요. 성경에서 분명히 얘기하십니다. 곰팡이와 같이 공동체에 죄를 퍼뜨리는 사람은 잘라내야 합니다. 내게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은 판단하고 떠나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요약하자면, 큰 교회 목사님이라고 다 옳은 거 아니고, 개척 교회 목사님이라고 그 말씀이 다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거…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지만, 연단을 받아 나온 사람에게는 기도제목을 얘기하고 요청할 수 있다는 거,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기도해줘야 하지만 죄를 짓게 하는 사람은 단호히 잘라내라는 이 세 가지입니다.
말씀을 기억하시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 승리하는 하루 보내시길 축복드려요~~~^^